
인쇄회로기판은 단가를 올리기 어려운 부품으로 꼽혀 왔습니다. 회로를 새겨 넣는 판이라 만들 수 있는 곳이 많고, 고객이 깎자고 하면 깎이는 자리였거든요. AI 서버에 들어가는 기판은 반대입니다.
이수페타시스는 7월 24일 기업설명회에서 AI 기판 공급 부족이 이어지고 있고 2분기에 판매가격 인상을 재개했다고 밝혔습니다. 공장을 새로 짓고 있는 회사가 단가까지 올릴 수 있는 이유는 하나예요. 이 기판을 만들 수 있는 곳이 많지 않고, 그 몇 곳의 라인이 이미 차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인쇄회로기판인데 왜 어떤 것은 여러 업체가 만들고 어떤 것은 몇 곳만 만들까요. 차이는 층수에서 시작합니다.

인쇄회로기판을 층수로 세는 이유
인쇄회로기판은 부품을 얹어 놓고 그 사이로 전기가 다니게 이어 주는 판입니다. 이어야 할 회로가 몇 개 안 되면 판 한 장 위에 다 그릴 수 있어요.
문제는 한 장에 다 그릴 수 없을 만큼 회로가 늘어날 때 생깁니다. 그럴 때는 회로를 여러 장에 나눠 그린 뒤 그 판들을 겹쳐서 눌러 붙입니다. 겹친 판과 판 사이는 아주 가는 구멍을 뚫어 잇습니다.
이렇게 쌓아 올린 판을 층수로 부릅니다. 8층, 16층, 32층 하는 식이에요. 일상적인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기판은 층수가 많지 않습니다.
이수페타시스가 만드는 것은 그보다 훨씬 두껍게 쌓은 다층기판(MLB)입니다. 층을 쌓는 이유는 두 가지예요. 신호가 다닐 길을 더 많이 내야 하고, 그 길들이 서로 간섭하지 않도록 사이사이에 전기를 흘려보내는 층을 끼워야 합니다.
층이 늘어난다는 것은 판 한 장을 만드는 일이 여러 장을 만들어 붙이는 일로 바뀐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단가도 층수만큼만 오를까요?
이수페타시스 기판 단가를 두세 배로 올린 다중적층 공법
층수가 두 배면 단가도 두 배일 것 같지만 그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단가를 정하는 것은 층수보다 어떻게 붙였느냐입니다.
여러 장을 한 번에 눌러 붙이는 대신, 몇 층씩 먼저 붙여 반제품을 만들고 그 반제품을 다시 붙이는 방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다중적층입니다. 이렇게 만들면 구멍을 판 전체가 아니라 필요한 구간에만 뚫을 수 있어서, 같은 두께에 신호가 다닐 길을 훨씬 촘촘히 넣습니다.
대신 누르고 굽는 공정을 여러 번 반복합니다. 한 번이라도 틀어지면 그때까지 쌓은 판을 통째로 버립니다. 같은 층수라도 다중적층으로 만든 기판은 수율이 낮고 시간이 더 걸려요.

이 공법이 필요한 곳이 800G 스위치와 AI 가속기입니다. 증권가에서는 다중적층을 적용한 800G용 다층기판의 판매단가를 400G용 제품의 두세 배로 봅니다. 파는 면적은 그대로인데 매출은 두세 배로 잡히는 셈이에요.
만들 수 있는 곳이 적으면 단가를 부르는 쪽이 바뀝니다. 이수페타시스는 7월 기업설명회에서 800G 스위치와 AI 가속기 쪽으로 신규 고객사 세 곳을 확보해 연내 양산을 목표한다고 밝혔습니다.
단가를 올려도 사 가는 쪽이 있다는 뜻인데, 그 쪽이 누구인지가 이 회사 실적의 다음 변수입니다.
북미 데이터센터 몇 곳이 매출 대부분을 만든다
이 기판을 사 가는 곳은 데이터센터에 들어갈 장비를 만드는 회사들입니다. 북미 비중이 높고 고객사 수가 많지 않아서, 이 회사는 고객사 구성이 그대로 실적 구조가 됩니다.
고객사는 크게 두 갈래예요.
네트워크 장비 쪽은 데이터센터 안에서 서버끼리 데이터를 주고받게 하는 스위치를 만듭니다. 400G에서 800G로 넘어가는 구간이라 기판 사양이 한 단계 올라갑니다.
AI 가속기 쪽은 연산을 맡는 반도체를 얹는 보드를 만듭니다. 범용 그래픽처리장치뿐 아니라 빅테크가 직접 설계하는 맞춤형 칩도 여기 올라갑니다.
데이터센터가 얼마나 늘어나는지는 국내 숫자로도 짚어 볼 수 있습니다. 한국데이터센터연합회는 국내 상업용 데이터센터 매출이 2024년 6조2200억 원에서 2028년 10조1900억 원으로 늘어난다고 봤습니다. 연평균 13.13%씩 커지는 속도입니다.
늘어나는 것은 개수만이 아니에요.
기존 서버는 랙 하나에 515kW를 썼지만, AI 서버를 채운 랙은 30100kW 이상을 씁니다.

같은 협회는 국내 상업용 데이터센터가 2029년에 1569MW의 전력을 공급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이를 랙당 10kW로 거칠게 나누면 15만 랙이 넘고, 랙당 50kW짜리 AI 랙으로 채우면 3만 랙 남짓으로 줄어듭니다. 들어가는 랙 수는 줄어드는데 랙 한 대에 얹히는 부품 사양은 올라간다는 뜻이에요.
데이터센터가 늘어난 만큼 기판이 더 팔리는 구조가 아닙니다. 한 장당 더 비싼 기판이 팔리는 구조입니다.
고객사가 적다는 것은 한 곳의 주문이 늘면 실적이 바로 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한 곳이 물량을 줄이거나 공급사를 바꾸면 그만큼이 한 번에 빠져요.
주문이 이렇게 몰릴 때 남는 문제는 하나입니다. 받은 주문을 다 만들 수 있느냐입니다.
공장이 다 차면 주문을 더 받아도 매출은 안 는다
기판은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판입니다. 주문이 두 배가 되어도 라인이 그대로면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수는 그대로예요. 그래서 이 회사의 매출 상한은 계약이 아니라 공장이 정합니다.
이수페타시스는 대구에 1공장부터 4공장까지를 두고 5공장과 6공장을 짓고 있습니다. 여기에 2027년까지 503억 원을 들여 달성2차산업단지 3만4800여㎡ 부지에 드릴 공정 공장을 새로 세웁니다. 드릴은 층과 층 사이를 잇는 구멍을 뚫는 공정이라, 층수가 늘수록 뚫어야 할 구멍도 함께 늘어납니다.
태국에는 2024년 합작사를 세워 중저층 기판을 만드는 거점을 마련했습니다. 손이 많이 가는 고다층 제품은 대구에서 만들고, 층수가 낮은 제품은 태국으로 넘기는 구조예요. 대구 라인을 단가가 높은 제품에 쓰겠다는 뜻입니다.

다만 증설은 발표한 날 끝나지 않습니다. 부지를 사고 건물을 올리고 장비를 들인 뒤 고객사 인증까지 받아야 첫 물량이 나갑니다. 그 사이 몇 분기 동안의 매출 상한은 이미 서 있는 라인이 정해 놓은 상태예요.
여기까지가 무엇을 만들어 어디에 파는지입니다. 남은 것은 이 구조가 실제 숫자에서 어떻게 보이는지 확인하는 일이에요.
이수페타시스 실적 발표에서 사업 구조를 보는 3단계
1단계, 제품군별 매출표부터 여세요. 사업보고서와 분기보고서에는 매출을 제품군으로 나눈 표가 실립니다. 여기서 다층기판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고, 그 안에서 고사양 제품이 늘고 있는지를 확인합니다.
2단계, 지역별 매출에서 북미가 어디까지 왔는지 보세요. 북미 비중이 오르면 데이터센터향 물량이 늘었다는 신호로 읽힙니다. 비중이 그대로인데 매출만 늘었다면 단가가 올랐거나 다른 지역이 함께 늘어난 경우입니다.
3단계, 주요 고객 집중도를 확인하세요. 사업보고서의 매출 및 수주 상황에는 특정 고객에 대한 매출 의존도가 적힙니다. 앞의 두 숫자가 좋아도 이 수치가 함께 올라가고 있다면, 실적이 한 고객의 발주 계획에 더 크게 묶였다는 뜻이에요.
2026년 2분기 실적은 8월 18일 발표될 예정입니다. 숫자가 나오면 위 세 가지를 직전 분기와 나란히 놓고 보면 됩니다.
다만 이 세 가지는 회사가 무엇을 팔고 있는지를 읽는 순서지, 주식을 사고팔 시점을 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증권사가 내놓는 목표주가나 생산능력 추정치는 회사가 확정한 숫자가 아니라 전망이에요. 회사가 직접 밝힌 숫자는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의 사업보고서와 회사 홈페이지 IR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고, 개별 투자 판단은 금융투자업 등록 기관의 상담을 받는 편이 안전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다층기판과 반도체 패키지 기판은 같은 건가요? A. 다릅니다. 패키지 기판은 반도체 칩을 직접 얹어 감싸는 작은 기판이고, 다층기판은 그 패키지들을 여러 개 올려 서로 이어 주는 큰 판입니다. 이수페타시스가 만드는 쪽은 뒤쪽입니다.
Q. 태국에서 만드는 중저층 기판은 어디에 쓰이나요? A. 통신 장비나 산업용 전자제품처럼 층수를 많이 쌓지 않아도 되는 제품에 들어갑니다. 단가는 낮지만 물량이 꾸준한 편이라, 대구 라인을 고사양 제품에 집중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Q. 원재료 값이 오르면 판매단가에 바로 반영되나요? A. 다층기판의 주재료는 동박적층판이고 구리와 유리섬유 가격이 여기에 반영됩니다. 계약 형태에 따라 반영 시점이 달라서 원재료가 오른 분기와 판매가에 반영되는 분기가 어긋나기도 하고, 회사가 공시하는 원재료 가격 변동 표에서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Q. 800G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 지금 설비를 그대로 쓰나요? A. 층수와 공법이 한 단계 더 올라가면 누르는 공정과 구멍을 뚫는 공정의 정밀도 요구도 함께 올라갑니다. 기존 라인에서 감당되는 부분과 새 장비가 필요한 부분이 나뉘기 때문에, 증설 발표가 나오면 어느 공정에 돈을 쓰는지를 같이 보면 판단하기 쉽습니다.
Q. 신규 고객사 세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나요? A. 회사는 고객사 이름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계약 규모가 일정 기준을 넘으면 단일판매·공급계약 체결 공시가 나오고, 사업보고서에는 이름 대신 매출 의존도만 적힙니다.
Q. 경쟁사는 어디인가요? A. 고다층 기판은 만들 수 있는 업체가 세계적으로 많지 않고, 북미와 대만·중국의 소수 업체가 같은 시장에 있습니다. 회사별 점유율은 공개 자료로 확인하기 어려워서, 고객사 인증을 새로 받았다는 발표가 나오는지를 대신 보는 편이 실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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